<출처_메이저월드>
분단의 아픔이 멈춘 지 7년이 지난 시점인 1960년 남한의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의 피해로 나라 전체가 ‘가난’에 허덕이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꽃피웠으며, 민주 시위의 불길이 점점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난한 시기에 민주 시위의 불길이 어떻게 타오를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1. 언론의 탄압으로 인한 불씨
1950년대 당시 언론인들은 최고의 지식 계층이었다. 친정부적 성격이던 ‘서울신문’을 제외하고 대부분 언론은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운동 성격을 강하게 피력했다. 각 언론사의 주필은 사설, 칼럼 등으로 독자들에게 민주적 가치를 지속해서 일깨워줬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언론사들의 사회 운동 성격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이승만은 초기 언론에 대한 자유의 신념을 저버리고 언론 탄압 정책으로 변질했다. 이승만의 언론 탄압은 1955년부터 시작된다. 어떤 탄압을 일삼았는지 알기 위해서는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55년 ‘동아일보’에서 편집상의 실수로 당시 대통령을 암시하는 단어인 ‘고위층’ 앞에 ‘괴뢰’라는 단어를 붙여버렸다. 당시 ‘괴뢰’라는 단어는 북한을 암시하는 단어로 사용되어왔다. 300여 부가 인쇄된 후 회수와 폐기를 진행하였음에도 평소 이승만이 싫어했던 ‘동아일보’였기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발행인과 편집인을 불구속 입건한 사건이 벌어졌다.
1958년 2월 4일에는 더 기가 막힌 사건이 벌어진다. 국가보안법의 3차 개정과정에서 17조 5항인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소조항임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야당 의원들에 반말에 이승만은 무술 유단자를 통원해 저지하고 여당 의원들끼리 점심시간에 모여 개정을 통과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의 시대상이 이와 같았고 이미 언론에 대한 탄압과 정치깡패를 동원한 테러행위, 날조 및 공작행위는 곪을 대로 곪아서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중이었다. 그리고 이들 언론을 구독하는 국민들은 점차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의 행동은 언론에 대한 탄압과 정치깡패를 동원한 테러 행위, 날조 등으로 부패해 터질 것만 같았던 시대였다. 이러한 행동들은 국민에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2. 스스로 무덤을 만든 이승만의 교육정책
당시 교육 수준을 오늘날 교육 수준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교육열 바람이 크게 불고 있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 정부의 국가 총예산의 평균 105%를 교육에 관련된 지출로 사용되어왔다. 그 외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의무교육제가 되었다.
1945년에서 1960년까지 학생 수는 3배로 증가했고, 문맹 퇴치 5개년 사업을 통해 비 문해율은 1945년 4.1%까지 떨어지게 됐다. 이와 더불어 초등~중등 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물론 이승만 정부가 원래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긴 했다. 이런 민주주의 정신과 이상이 강조된 이유는 그 당시 국제정치 배경 때문이었다. 당시 국제정치는 스탈린주의가 좁게는 북한, 넓게는 소련에 이르러 세계를 양분해 첨예한 대립각을 형성하던 시대였기에 한국도 이런 정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거기다 많은 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욕구가 점점 늘어났고
거기다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 결과 많은 대학생들이 생겨났으며, 1945년에 비해 1960년 대학생만 무려 9만 명이 늘어났다. 이렇게 대학생 수가 늘어난 요인은 이승만의 교육정책 때문이었다.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제도를 개선하여 엘리트를 양성한다는 것이 이승만이 교육정책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승만의 목표는 훗날 자신에게 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3. 도시로 모여든 시민들
교육을 받게 되면서 깨어 있는 국민들이 많아지게 된다. 그런 국민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집중되면서 일종의 상승효과가 나타났다. 당시 교육 수준을 더 이야기하면 1955년 전국 대학 중 85개 대학의 소재는 도시 내에 있거나 적어도 근교에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서울 소재 대학만 29개에 달했다. 이러다 보니 1960년 기준으로 전국에 있는 대학생들 대부분이 서울에 살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이승만의 언론 탄압이 있었음에도 언론의 끝없는 사회활동은 민주주의의 불씨를 키워 왔다. 언론의 민주주의를 향한 사설, 칼럼, 논평들을 서울의 수많은 대학생과 국민들이 읽기 시작하면서 서울의 일간지 보급률은 100명당 무려 25.5부에 달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수치다. 당시 유네스코에서 정한 근대화 기준 일간지 보급률은 100명당 10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4. 이승만 80세 되더니 노망?
이승만은 행보는 지금껏 자기 다음 실세의 탄생을 막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정권의 핵심 인물들 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심복이나 측근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나이가 80세에 접어들면서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그도 노망이 난 것인지 평소 많이 만나던 자유당의 고위인사들을 신임하고 대통령의 경호를 책임지던 곽영주 경무관을 부 부대통령이라는 별칭을 부칠 정도로 믿는 모습을 보여왔다.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곽영주는 각종 권력형 범죄를 저질러 물의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는 언론인 그리고 지식인과 대학생에게는 반정부주의 성향을 더욱 크게 만들었고 결국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기폭제의 역할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