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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민주주의의 염원이여 불타올라라! 혁명의 시작

등록일 2023년03월08일 15시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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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 이후 이승만 정부의 불신이 국민들의 마음에 가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승만과 그 일당들은 국민들의 마음에 불신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장기 집권을 위해 움직였고 민주 세력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데 주력했다.

 

1960년 대한민국은 제3대 정부통령선거를 맞이한다. 자유당은 당연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과 부통령으로 이기봉을 당선시키고자 했다. 당시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이 단일후보라 거의 당선된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부통령으로 이기붕이 꼭 당선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승만 나이가 80세 고령자였기 때문에 유사시 권력을 이어받는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이 꼭 되어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승만과 자유당은 꼼수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 꼼수는 ‘후보 지명을 조기에 끝내는 것’이다. 이승만이 조기에 후보를 정하도록 한 것은 장관이나 자유당이 일찍부터 선거운동에 돌입하여 총력전을 펴라는 지시와 다름없었다. 최인규는 그해 11월부터 메일 같이 경찰 간부, 군수, 등 공무원들을 만나 당선이 될 수 있도록 대책을 세우라 지시하기도 했다.

 

1959년 이승만은 최대 맞수인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꼼수를 펼친다. 바로 조봉암에게 간첩 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만들어 진보당을 강제 해산시키고 그를 사형 시켰다. 신두영 국무회의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이 조봉암을 어떻게든 제거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뒤로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꼼수를 일삼았다. 그리고 정부통령후보 등록 마감일에 이승만은 국민을 상대로 무서운 발언을 퍼부었다.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승만은 왜 이렇게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 목숨을 걸었을까?

 

 

그 이유는 1956년 정부통령선거 때문이다. 이때 선거 결과는 유효표 721만여 표 중 이승만이 504만여 표, 조봉암이 216만여 표로 발표되었는데, 대부분이 제1-2대 국회의장인 신익회의 추모 표인 무효표 185만여 표를 고려하면 이승만은 전체 투표자의 절반을 약간 넘은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항상 국민의 절대다수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라고 과시한 이승만으로서는 치욕적인 득표수였다. 더군다나 부정 투표와 개표가 적은 서울의 경우 이승만은 20만여 표밖에 얻지 못했고, 무효표가 28만여 표였다. 죽은 신익회보다 적게 표가 적게 나왔다. 이런 결과는 서울 시민들에게 이승만과 자유당은 미움의 대상이자 민심이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승만의 발언은 단순히 국민을 대상으로 한 협박만이 아니다. 이 말은 자유당과 최인규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붕을 꼭 당선시키라는 지시와 다름없었다. 최인규는 나중에 법정에서 2.13 담화가 자신에게 큰 압박을 줬다고 고백했다. 최인규는 공무원인 경찰들을 시켜 선거운동에 가담하게 했으며, “선거운동을 한 공무원 신분은 내가 보장하겠다”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선거 직전인 3월 3일 경찰의 양심선언으로 민주당이 3.15 부정선거의 진상을 폭로했지만,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부정선거를 꾸미고 있었다.

 

 

결국 이승만과 자유당의 행동에 국민들은 분노했고,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전개된다. 3.15 대선을 앞두고 일어난 최초의 민주개혁을 요구한 시위다. 시위 배경은 이러하다. 당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장면’의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갈 수 없게 만들기 위해 일요일에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꼼수에 분노한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말라”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호응한 대구지역 여러 고등학교(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등 8개 학교) 학생들(총 1,200여 명)이 27일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인 28일에는 경북고 3학년 학생회장 이대우가 "부정에 항의하고 신성한 권리를 지키는 것"을 요지로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들의 시위를 공산당 사주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며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2.28일 학생 민주 의거 다음 더 큰 시위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고등학생이 들고일어났다. 전국 각지에 공명선거를 촉구하는 삐라가 뿌려졌고, 3월 8일 대전에서는 대전고등학생 1,000여 명이 집결해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출동하여 수십여 명이 연행되는 일도 벌어졌다.

 

선거 전날 시위는 더욱 타올랐고 서울, 부산, 인천, 원주, 포항 등 각 지역의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의 고등학생이 ‘학원의 자유’와 ‘공명선거 실시’를 외쳤다. 이에 어른들도 2월 28일 ‘공명선거추진 위원회’를 조직하여 부정선거를 못 하도록 결의했다.

 

고등학생들과 국민들의 시위에도 3.15일 부정선거는 막지 못했다. 선거날에 발생한 폭력과 부정은 대한민국 역사에 수치요 민주주의 퇴보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먼저 경찰과 이승만 정부는 선거 전 투표함에 30~40%의 투표지를 미리 넣어놨다. 그밖에 대리투표는 기본이었고, 물품을 뿌려 자유당 투표를 독려했으며, 투표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3~5인조로 묶어 투표시키기도 했다. 3~5인조 투표할 때 조장에게 투표지를 확인받아야 했다. 당연히 조장은 자유당 지지자가 했었다. 심지어 정치깡패를 통원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시민들에게 위압감을 주기도 했다. 하다 하다 시계를 조작해 선거가 종료되지도 않았는데 투표가 끝났다며 선거장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이러한 부정선거를 견디지 못하고 선거가 끝나기 전인 오후 4시 30분, 민주당 중앙당은 "3.15 선거는 불법 무효다."라고 발표했다.

 

선거의 결과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압승이었다. 조작이 너무나 심해 득표율 90%를 넘자 이승만 정부는 임의로 득표율을 낮춰 이승만이 전체 88.7%, 이기붕이 전체 79%로 당선됐다고 발표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부정선거에 국민은 분노했다. 광주 금남로에서 최초로 시위가 일어났으며 당시 진압 과정에서 10명이 부상당했다. 한편 마산에서는 아침부터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민주당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버리자 미리 기표해 둔 용지가 쏟아지며 부정선거가 적발되었다. 부정선거에 분노한 시민들은 오후 3시 42분부터 오동동 민주당 경남도당사와 불종거리 등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에게 강제 진압을 당했고, 투표가 종료된 그날 저녁에는 마산시청과 자유당 당사가 이던 자산동 일대에서 3,000여 명이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때 경찰의 진압으로 김주열 열사를 포함해 9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김주열 열사는 밤 10시쯤 경찰이 진압으로 쏜 최루탄이 눈을 관통당하여 사망했다. 이승만 정부는 사망한 김주열 열사를 실종자로 처리하였고 시신을 유기하기까지 했다. 결국 4월 11일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4·19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기획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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