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명화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
7월 우리가 만나게 될 명화는 조선 시대 풍속화의 대가 ‘단원 김홍도’다. 1741년(영조21)에 태어난 김홍도는 무반에서 중인으로 전락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디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밝혀진 바 없다. 다만, 그가 어릴 적 경기도 안산에 있는 강세황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으로 어린 시절 그는 안산에서 자란 것으로 추정된다.
강세황은 조선에서 유명한 화가로 글과 그림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와는 스승과 제자로 직장의 상하관계로 훗날 예술적 동지로 지내게 된다.
김홍도는 강세황의 추천으로 이른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 20대 초반에 이미 궁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1773년에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인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감목관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에서 근무했다.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손자인 정조가 조선의 제22대 임금이 되었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으로 옮기고 그곳에 용주사라는 절을 지었는데, 절에 필요한 그림을 김홍도에게 맡겼다. 이때 그린 그림 중 삼세여래후불탱화 보물 제1942호 지정되어 있다.
김홍도의 호인 단원은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따서 단원이라 스스로 칭했는데, 이는 이유방이 지닌 문사로서의 고상하고 맑은 정신과 기묘하고 아취가 있는 그의 그림을 사모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7월의 명화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월
조희롱의 ‘호산외사’에 의하면 단원은 풍채가 아름답고 마음 씀이 크고 넓어서 작은 일에 구속됨이 없으니 사람들은 신선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강세황 역시 ‘단원기’에서 단원의 인품을 보면 얼굴이 청수하고 정신이 깨끗하여 보는 사람들은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고 적었다. 단원은 회화에서뿐 아니라 거문고, 당비파, 생활 등을 연주하는 음악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일찍부터 평판이 높았던 서예가이고, 빼어난 시인이었다.
김홍도는 1791년에는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일에 또 한 번 참여하게 되었고, 그해 12월 포상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발령받았다. 이는 중인 신분으로 그가 오를 수 있는 종6품에 해당하는 최고 직책이었다.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홍도는 충청위유사 홍대협이 조정에 올린 보고가 발단이 되어 만 3년 만에 연풍현감 자리에서 파직되었다.
7월의 명화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월
1795년 서울로 돌아온 김홍도는 그림에 전념했다. 그의 나이 51세로 원숙기에 접어든 그는 이때부터 단원화풍이라고 불리는 명작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으로 행차하는 광경을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조선시대 기록화의 기념비적 대작이고, ‘을묘년화첩’과 ‘병진년화첩’은 우리나라 진경산수의 온화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표현한 명작이다. 김홍도는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준 화원다운 치밀함과 섬세함 대신 대가다운 과감한 생략과 스스럼없는 필묵의 구사로 단원 산수화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김홍도는 왕의 어진에서 촌부의 얼굴까지, 궁중의 권위가 담긴 기록화에서 서민의 삶의 애환이 녹아 있는 속화까지 신분과 장르를 아우르며 그림을 그렸다. 화가 신분으로 종6품에까지 오르는 세속적 출세를 맛보았고, 비록 말년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 생을 마감했으나 일생동안 시를 읊고 고졸한 멋을 즐길 줄 아는 진정 위대한 화인이었다. 김홍도의 작품은 조선시대 우리 문화와 역사를 고찰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으며, 동시대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